2012년 9월 14일 금요일

둠즈데이 북 - 코니 윌리스


둠즈데이 북

앞표지
열린책들2005. 2. 10. - 820페이지
위트 넘치는 입담을 자랑하는 작가 코니 윌리스. 이 책은 그가 들려주는 14세기 중세 영국으로의 시간 여행기를 담고 있다. 「화재 감시원」에서 시작하여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두 시대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와 작가 특유의 코믹한 화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5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중세학을 전공하는 키브린은 꿈에도 그리던 1320년으로의 시간 여행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키브린이 빛과 함께 과거로 사라짐과 동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그녀가 언제 어디로 갔는지 유일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기술자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쓰러진다. 한편 중세에 도착한 키브린 역시 끊임없이 울리는 종소리가 불길하게만 느껴지는데....

작가는 '시간여행'을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일종의 장치로 이용할 뿐 이러한 시간 여행이 과거나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한다. SF 특유의 과학적 사고에 치중하기 보다는 페스트가 막 돌기 시작한 작은 마을을 통해 중세 영국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전하는 한편, 가공할 고통에 맞서는 인간들의 불굴의 의지를 그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 처음 작품이 발표되었던 1992년 당시 SF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던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작가에게 안겨주기도 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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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네트'라는 장치가 보편화되어 역사연구에 사용되고 있는 2054년의 이야기와, '네트'를 통해 중세로 떠난 역사학과 학생 '키브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네트'라는 시간여행 장치가 다른 매체들에서 보아왔던 시간여행 장치와 다른점은 '네트'를 통해 시간여행을 함으로써 '인과모순'을 발생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 현대의 의약품 - 항생제, 백신-등을 과거로 가져가 전염병을 치료하여 역사를 바꿔버릴 수도 없고, 최신 무기를 가지고 가 세계정복을 할 수도 없다. 역사를 바꿀 만한 것은 물건이든, 바이러스든, 어떤 것이든 네트를 통과할 수 없다. 심지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정확히 떨어질 수 도 없는데, 이는 '네트'가 인과율을 깨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내부적인 원리에 의해 시간, 공간적 편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키브린은 역사학과 학생이다. 자신을 매우 아끼는 던워디 교수님이 중세로 떠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다며 계속해서 만류하지만, 결국 1320년 페스트가 발병하기 28년 전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키브린이 과거로 떠남과 동시에 네트를 조작하는 오퍼레이터를 시작으로 2054년 현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진다. 오퍼레이터는 던워디 교수에게 와서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의식을 잃는다.
중세로 떠난 키브린도 오퍼레이터가 걸린 병으로 인해, 의식을 잃고 길에 쓰러지게 되고 주변의 사람들이 키브린을 발견하고 자신의 마을로 옮겨간다. 그 때문에 키브린은 자신이 어떤 장소에 강하했는지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현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키브린은 그 장소를 알아내야만 한다. 그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키브린은 강하가 잘못되어 원래 목표하던 1320년이 아닌, (페스트가 퍼져나가기 시작한) 1348년에 강하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 소설은 하드 SF는 아니다. 과학적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미래를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도 않고 과학적으로 엄밀한 SF도 아니다( 2054년 미래에 개인용 휴대 통신장비가 없다!...). 또, 치밀한 플롯, 복잡하고 예상할 수 없는 전개와 반전 등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잡지 말아야겠다. 이 소설의 재미는 작가가 5년 동안의 자료조사와 준비를 통해 이뤄냈다는 생생한 중세의 묘사,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현대와 중세의 대비. 전염병을 이겨내려는 중세와 현대 사람들의 모습 등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단순하다고 할 수 도 있는 스토리를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역량, 캐릭터들의 모습도 이 소설의 재미이다.)

둠즈데이 북에서 그리고 있는 중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열악한 위생상태, 주거환경, 지식수준. 그런 상황에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져나가는 페스트에 속수무책일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균에 대한 지식도 없고, 어떻게 병이 감염이 되는지도 알지 못했던 중세인들은 그저 페스트를 하나님이 내린 벌,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도 그럴것이 전 유럽인구의 1/3~1/2이 죽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페스트에 맞서 중세인들은 여러가지 모습을 보인다. 자포자기하고 미리 무덤을 파는 사람, 도망치는 사람들(페스트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이 사태에 대한 원흉, 비난할 사람을 찾는 사람, 종교의 힘으로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신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페스트에 대처한다.  한 편 키브린은 이성적으로는 자신은 과거에 있고, 어찌됬든 이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으며, 자신이 역사를 바꿀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사람들을 페스트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막을 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 좌절한다. 키브린의 모습을 통해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키브린은 주변 사람의 마음을 구원해줄 수 있었다. (키브린을 통해 죽는 순간까지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로슈 신부의 마지막 장면은 눈물 글썽거리면서 읽었다 ㅠㅠ). 키브린을 보며 또다른 생각을 한 것이, 많은 지식과 첨단 기기들로 무장해 중세인들보다 우월해 보이는 우리도, 그러한 도움없이는 중세인과 똑같은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을 새삼했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이 이룩한 현대 문명의 위대함, 인간이 이뤄온 진보의 역사 (부작용을 무시할 순 없겟지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차이는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2054년위 모습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현대에 퍼져나가는 전염병도 처음엔 무시무시하게 퍼져나간다. 다행히 현대 의학의 힘, 발달한 행정체계 등으로 인해 신속하게 전염지역을 격리하고,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위험한 전염병이었지만, 중세의 페스트와 비교해 볼 때, 그 피해의 폭은 적은 편이었고 사람들의 대응도 체계적인 편이었다. 정부가 상황을 컨트롤하는 능력, 위험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 아직 완벽하진 않겠지만, 몇백년간 눈부시게 발전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매우 다른 두 사회의 모습을 그리지만 한 편으로 사람사는 세상은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장면들도 있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어린아이(귀엽더라...), 남녀간의 금지된 사랑(불륜...-_-), 고부갈등... 술자리에서 끝까지 달리는 사람..있을건 다있다.. 많은 것이 바뀌어도 그 안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비슷한가보다.

소설 본연의 역할인 읽는 재미는 물론 중세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이런저런 생각거리까지 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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